여섯 살과 예순 살이 친구 되기
통합은 세대를 넘어 확장됐습니다. 잭슨 폴락 작품인가? 오봉살롱 입구에 걸린 대형 그림을 보면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겁니다. 호쾌하게 흩뿌린 색색깔이 어우러진 이 그림이 김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지난해 말 여섯 살부터 예순 살까지 12명이 모였습니다. 서로 별명을 부르며 평어를 썼어요. 천막 천 위에 캔버스를 깔았습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양말 벗고 바지 걷고 물감을 뿌리고 찍었습니다. 오봉살롱의 대표작은 그렇게 탄생했어요.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도 사회적 활동하기 힘들잖아요. 늙고 몸이 힘들면 다 요양원 가야 할까요? 또 일상에서 자기가 선택하는 경험이 발달장애인에겐 부족해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마을이 중요한 거죠.”
2017년 서울에서 경남 양산으로 이사 온 그는 이런 연결이 일어나도록 1층에 친환경 비카페 오봉살롱을, 2층엔 자신과 비컴프렌즈 멤버 중 한 명인 박유미 씨 가족이 살 집 두 채를 올렸습니다. 2층 살림집 두 채의 이름은 ‘호우시절’, 한 채엔 김 대표가 살고, 다른 한 채는 지금은 도시 양봉을 경험할 수 있는 스테이로 운영 중입니다. ‘뭐든학교’ 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인 박유미 씨네는 ‘뭐든학교’가 커지면서 새로 지은 건물로 이사했어요.
“워커홀릭” 광고·전시 기획자였던 그의 삶은 39살에 첫 아이를 낳고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들은 남달랐어요. 돌도 되지 않아 알파벳과 도형을 구분했습니다. 아이가 20개월 때 어린이집 원장이 그에게 시시티브이(CCTV) 화면을 보여줬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함께 놀 때 아들은 벽면만 훑고 다녔어요. 치료센터에서는 다들 “엄마가 아이에게 올인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지금 저는 그렇게 조언하지 않아요. 아이만이 중심인 그 상황이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죽을 것 같았어요.” 아들이 다섯 살 때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공공디자인을 공부했습니다. 일자리를 잡을 순 없었어요. 아이가 학교 갈 즈음이 되자 예측불가능한 돌발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꿀벌의 경이로운 세계
그리고, 예측한 적 없는 방식으로 꿀벌의 경이로운 세계가 그 앞에 펼쳐졌습니다. “벌이 제 스승이에요. 하루 종일 ‘벌멍’을 해도 지루하지 않아요. 조금만 더 알면, 그 귀여운 엉덩이를 보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꿀벌은 생애주기에 맞춰 제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제 속도에 맞게 그 역할에 열심이죠.
비컴프렌즈의 발달장애인 두 직원은 부지런한 ‘꿀벌’입니다. 2017년 그가 처음 ‘비컴프렌즈’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한 예상이 맞았습니다. 벌들이 화가 나면 윙~ 소리가 변하는데 이 직원들은 이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챕니다. 비컴프렌즈는 영세 양봉업자들에게서 꿀벌이 꽃물을 먹고 만든 꿀을 사 ‘오봉미엘’이란 이름으로 비누, 스틱꿀 등을 제작하는데, 그때 이 직원들의 ‘강박적’ 정밀함이 빛을 발합니다. 비컴프렌즈는 이들의 경험을 기록해 발달장애인 중심 도시양봉 교육 직무설계(매뉴얼)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오봉초등학교 급식실 나무에 벌집이 매달렸습니다. 꿀벌인지 말벌인지 구별해야 하니 그가 119와 함께 출동했습니다. 꿀벌집이었어요. 119 사다리가 닿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며 학생들의 결론은 “그냥 두자”였습니다. “‘내가 쏘일까 무서우니 죽여주세요’가 아닌 거예요. 꿀벌이 인간과 공존해야 하는 곤충이라는 감수성이 이렇게 높아졌구나, 보람을 느꼈습니다.”
비컴프렌즈는 꿀벌과 인간,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넓혀갔습니다. 2020년 10월 경남도립미술관 3층 벽면에 발달장애인 33명의 영상이 뜹니다. 비컴프렌즈의 전시실입니다. 스크린 하나는 비어있습니다. 그 앞에 서면 관객이 34번째 얼굴이 돼 33명과 눈 맞추며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