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추석, 고양시로 올라간 날 저녁, 아버지가 자기 방으로 잠깐 들어오라고 했어요. “너한테 말해 둘 게 있다. 여기 두 번째 서랍에 중요한 서류들이 있다.” 아버지는 검은색 수첩을 들춥니다. “여기 통장 번호랑 비밀번호가 있다.” 적혀 있는 전화번호들을 가리킵니다. “급할 때 여기 전화하면 된다. 동문회 연락처다. 화환 하나는 보낼 거야.”
아버지는 장례라는 단어는 생략합니다. 저는 울었어요. “그런데 집 문서가 어디로 갔지?” 거실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엄마가 끼어듭니다. “아, 그러니까 서류 가방을 바꾸지 말라고 했더니 굳이 바꿔서!” “아, 집문서 어디 갔어?” 말라서 내복이 헐렁헐렁해진 아버지가 방을 뒤지기 시작하고 어머니는 계속 “깜박깜박하면서 왜 가방은 바꿨대”라고 구시렁대면서 아버지를 돕습니다.
그날 오른손 엄지가 구부러지지 않는 어머니는 어묵국을 끓이고 삼치를 굽고 연어장을 만들었어요. “밥을 먹고 다녀라”라는 말을 여러 번, 결국 내가 “알았다고!” 버럭 할 때까지 합니다. 그날 밤, 저는 아버지의 오줌 소리를 들었어요. 쪼르륵, 한참 끊겼다 다시 쪼르륵. 다음 날 제가 “그래도 이 나이에 아빠처럼 몸이 꼿꼿한 사람은 없어”라고 했더니 그는 목을 뒤로 잔뜩 빼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바로 섭니다. 아버지의 턱은 계속 흔들렸어요.
저는 알고 있어요. 두 사람은 제가 그들 곁, 수도권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걸요. 두 사람에겐 제가 필요합니다. 어머니는 종합병원에서 신경과 약을 정기적으로 타야 합니다. 남해 상주면에 의원은 딱 한 명이죠. 그것도 시골 중에선 운이 좋은 축입니다. 다들 그 의사가 떠날까 불안해합니다.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걸 본 엄마는 남해에 사는 게 두렵습니다.
두 사람은 운전할 수 없어요. 한 시간에 한 대꼴로 버스가 다니는 이 마을에 살면 두 사람은 고양시에서보다 자유를 잃을 겁니다. 군 단위 주민에겐 수도권 사람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들이 당연하지 않죠. 그래도 이곳에서 같이 살자 할까? 내가 수도권으로 돌아가야 할까? 내 삶은 어떻게 되는 거지? 왜 혼자 사는 딸이 부모랑 같이 살며 돌보는 게 당연할까? 이런 생각하는 나는 나쁜 년이 아닐까?
부모님이 택시 논쟁을 하며 고양시로 떠나고 난 뒤, 집에 돌아와 남겨진 물건들을 봅니다. 이제 바닥은 그냥 바닥이 아니라 어머니가 걸레질한 바닥, 화장실 물컵은 아버지를 불안에 빠뜨렸던 물컵, 해변은 몽덕이와 어머니가 함께 거닐었던, 햇살에 그들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던 해변이 됐습니다. 저는 그들의 흔적이 남은 사물만 남는 날이 올 거란 걸, 반드시 올 거란 걸, 압니다. 두 노인이 그리워 울며, 화장실 물컵을 플라스틱컵으로 바꿉니다.
글·사진: 김소민 희망제작소 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