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에 ‘오래된 미래’에서 잘 살고 있다 떵떵거리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새 책방 그만두겠다고 난리를 피웁니다. 이 노동은 뭉근한 불에 사람을 쉼 없이 곱니다. 생활비가 빠지는 똘똘한 직장이 시골엔 흔치 않습니다. 이곳 제 주변 사람들은 생활비 걱정 없을 정도로 자산이 있거나, 공무원이 아닌 이상 거의 엔(N)잡러입니다. 저만 해도 책방으로는 몽덕이 사룟값도 빠듯하니 희망제작소가 아니었다면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빵집 언니 콩풀은 아침에 빵을 굽고 오후엔 지역 방과후 돌봄을 하는 ‘상상놀이터’ 선생님으로 일합니다. 누가 시골에서 힐링한다고 하나요? 콩풀 언니 다크 서클이 발등까지 내려와있습니다. 

책방 일은 가사노동을 닮았습니다. 해도 티가 안 나는데 안 하면 티 납니다. 모임에 행사까지 돌려야 하니 저 같은 내향형 인간은 집에 돌아오면 영혼은 간 곳 없고 가죽만 남습니다. 점점 포악해져 막말 제조기가 됐어요. 이렇게 사는 게 맞을까? 타인과의 연결을 바랐는데 나와의 연결마저 끊겨버리는 건 아닐까?

그때 등장했습니다. 18살 푸름이(별명), 제 스승이.

두 달 전 전자우편 한 통이 왔습니다. 경기도 가평 대안학교 샬롬자유학교 2학년 학생이 두 달 동안 은모래마을책방에서 인턴을 하고 싶답니다. ‘읽씹’ 하려 했습니다. 무서운 청소년까지 돌볼 순 없었어요. “마을 공동체 회복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다”로 시작하는 지원서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푸름이의 자기소개서에는 자기가 어떻게 책방에 기여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8~13살 대상 원데이클래스 기획안까지 첨부했는데 목적, 세부 내용, 결과물에 예산까지 썼어요. 이런 기획안을 쓰는 10대는 누구지?

“거기 책장 뒤에서 폴짝 뛰어나오세요.” “지금! 고개를 돌려요.” 전자우편을 받고 두 달 뒤 반백 살인 저는 푸름이가 시키는 건 다 했습니다. 푸름이가 책방 동영상을 만드는 중입니다. 그가 편집해 올린 릴스를 보고서야 왜 저보고 도가니 후들거리도록 뛰어다니라 했는지 이해했습니다. 푸름이는 다 생각이 있었던 거예요. 긴 머리 구불구불 기른 이 10대가 책방에 오고 난 뒤 책방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환골탈태했습니다. 동영상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팔로워가 20% 늘었어요.(물론 그 전 숫자가 미미해서이기도 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좋아하는 가수 신지훈의 동영상을 보며 기타를 익히고 작사·작곡을 시작한 그는 책방 북토크 때 식전 공연을 펼쳤고, 책방 블로그를 개설해 매주 글을 쓰고, 책방 상무 강아지 몽덕이 키링을 만들었고(곰 같아 보이긴 하지만), 고무장갑을 척척 끼더니 책방 화장실 숨은 곰팡이를 박멸했습니다.(저는 곰팡이가 있는 것도 몰랐습니다.) 사이사이 동고동락협동조합 치유농장에서 텃밭 가꾸기를 돕고 방과후 돌봄 ‘상상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키링 만드는 법을 알려줬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푸름이는 ‘일잘러’ 매니저 같은 인턴이었습니다. 스승으로 모시기로 한 건 어느 날 해물파전 앞에서예요. 어떤 대화 끝인지는 모르겠는데 푸름이의 이 말이 귀에 꽂혔습니다. “저는 여기 오기 전에 기도했어요. 고난을 주시라고, 다만 고통을 겪는 동안 하나님이 곁에 계셔달라고.” “왜?” “그래야 제가 성장하니까요.” 아이처럼 웃는 푸름이를 저는 한참 바라봤습니다.

푸름이에게 책방만 ‘고난’을 준 건 아닙니다. 여느 직장인 뺨치게 회의가 많았습니다. 대여섯 개 프로젝트가 돌아갔습니다. 학생들이 홍보팀, 재정팀, 연출팀, 총괄로 나뉘어 같이 일했습니다. 일 중 하나가 테마기행 비용을 마련할 학교 일일장터랍니다. 1학기에 학생들이 모여 1년 동안 공부할 주제를 정합니다. 2024년엔 한국 근현대사였어요.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며 소주제를 잡습니다. 그다음은 테마기행입니다. 2024년 ‘해방 전’을 맡은 푸름이는 민족문제연구소, 우리민족서로돕기, 흥사단 등 8개 단체를 섭외해 인터뷰했습니다. 배운 걸 모아 책을 내고 전시했습니다. 일일장터 행사 기획부터 실행까지 학생 몫입니다. 직접 만든 수세미, 천연비누 등을 팝니다.

2025년 푸름이가 선택한 주제는 ‘예술’입니다. “마을 어르신들하고 교류를 많이 하거든요. 저희가 마을 자치회 청소년분과 임원으로 활동해요. 가평에 청소년들이 공짜로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요.” 게다가 다른 대안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안교육에 대한 포럼까지 준비한다고 했어요. 흰 빨래에 청바지물이 잔뜩 들어버린 어느 날, 푸름이는 버거워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모두 제가 선택한 거예요.” 일이 몰리면 날이 서기 마련입니다. “감정을 굴려서 말하는 연습을 해요. 학교는 안전하니까요. 관계가 무너지지 않을 거란 신뢰가 있어요. 그래서 시도를 많이 했어요. 저를 위해서요. 세게 말해보기, 순하게 말해보기.”

푸름이의 질문은 푸름이의 것, 푸름이는 자기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몸을 부딪쳐 찾았습니다. “직업 못 구할까 돈 못 벌까 불안하지 않아?” 우동을 후루룩 먹으며 푸름이가 답했습니다. “전혀요. 예를 들어 제가 지금 미디어 프로그램을 다루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공부하거든요. 지금까지 어떤 걸 하겠다고 마음먹고 노력하면 할 수 있었어요. 학교에서 주도적으로 해봤잖아요. 사회에서도 그럴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어요.” “너는 꿈이 뭐야?”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푸름이는 초등학생 때 ‘은따’를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가해자 아이의 부모가 학교에 찾아와 되레 푸름이에게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절대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가정교육이 중요하구나. 모든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유치원에서 그 역할을 해줘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는 책방 전에 아동교육기관에서 인턴을 했어요. “적성에 잘 맞더라고요. 다만, 정해진 시간에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다일까? 공동체 역할이 중요하지 않을까? 공동체를 알고 싶어 은모래마을책방에 지원한 거예요.”

18살 사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푸름이는 괴로웠던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를 썼습니다. “일기에 제가 저한테 쓴 말을 읽으면, 제가 절 아낀다는 게 보여요.” “푸름아, 행복이 뭐야?” “저는 공부 잘하고 돈 많이 버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 가르침이 뭔데?” “사랑하라.” “너는 행복하게 살 거 같아.” “저는 이미 행복해요.” “너는 신이 널 사랑한다고 느끼니?” “매 순간이요.”

18살 푸름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자아를 깨는 것이 모순이 아님을 이미 알았습니다. 교육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피터 파커는 책 <역설>에 이렇게 썼습니다.

”교육을 잘 받았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너는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을 깊이 아는 것이다.” 

글·사진: 김소민 희망제작소 시민연결팀 연구위원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실천에 함께해주세요. 수도권에 인구 절반이 살면 그 누구도 행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지역은 사람이 없어서, 수도권은 사람에 치여서 괴롭습니다. 지역균형발전은 인구 분산만 뜻하지 않습니다. 삶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희망제작소는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정책들을 고민합니다. 응원해주세요.